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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예배 후기] 같이 갇힐 용기는 어디에 있나 / 이하늬

목, 2016/04/21- 23:43 익명 (미확인) 에 의해 제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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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를 가지면 가치와 갇힌다

같이 갇힐 용기는 어디에 있나

-42번째 예배공동체 고함 후기-

 

이하늬

 

지하실 계단을 타고 오르는 찬양소리. 할로겐 조명 사이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고함예배 식구들이다. 반가운 얼굴을 뒤로 하고 빈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가치와 같이 갇히다" 갇히길 감수하면서까지 지켜야했을 가치는 대체 무엇일까. '양심수'라는 이름엔 떠오르는 상념이 많다. 시대의 증인들. 고난받기를 자처하는 이들. 그리고 그럴 용기가 없는 나. 가벼운 자책감을 가슴에 묻어두고 하늘 뜻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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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있는 김성윤 목사의 아내 권명희님>    

 

가치를 가지면 가치와 갇힌다.

"어느날 친구가 날 찾아왔어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이미 한차례 고초를 겪었던 친구에요. 그런데 당국에서 날 주시하고 있단 얘기를 듣자 대뜸 '괜히 왔다' 하는거예요. 친구는 이미 전력이 있기 때문에, 나를 만나면 또 고초를 치룰 수도 있단 얘기였죠. 그래서 난 그 친구에게 '꺼져라' 했어요."

 

역사의 발전에 따라 전쟁의 방식도 달라져왔다. 고대의 전쟁은 시민, 자유민들의 전쟁이었다. 로마에서 노예계급은 오직 콜로세움 안에서만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전쟁을 치루는 일은 오직 시민계급의 몫이었다. 전쟁의 목적은 상대의 말살이 아니었다. 죽이는 만큼 얻을 수 있는 노예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전쟁은 주로 용병들이 수행했다. 이들은 관심은 오직 계약에 따른 보수일 뿐, 상대를 죽이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적군 역시 나와 같은 처지의 용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발생과 함께 상비군이 재편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다. 시민, 용병 대신 전문적인 군인이 전쟁을 수행하게 됐고, 공교육이 이를 보조했다. '우리가 아닌 사람은 죽여야한다'는 사상으로 무장된 군인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적군을 죽이길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나는 더이상 적에게 칼을 휘두르고 싶지 않다. 나는 적도 사랑할 대상으로 여기고 싶다' 이제 국가권력은 자국민을 향해서도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국가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조국에 충성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말이다. 이렇게 탄생하게 된 이들이 바로 '사상범', '양심수'. 그래서 최 목사님은 국가보안법을 두려워하는 친구에게 "꺼져라"했나보다. 이 나라는 신체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중 단 한 가지만 가지라 하니 말이다. 가치를 가지면 가치와 갇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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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 뜻을 전하고 있는 최재봉 목사(하사미 교회)>

 

같이 갇힐 용기는 어디에 있나.

국가는 모든 자유를 포기하고 국가에 충성하길 요구한다. 사상의 자유, 신체의 자유, 심지어 사유재산의 자유까지. 비록 아직 나는 감옥에 있지 않지만, 다음 갇힐 차례는 나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갇혀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적군을 사랑할 자유'가 내겐 없지 않나.

그렇다고 내게 국가권력에 대놓고 저항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점에선 최 목사님을 찾아온 친구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그러다 정말 나도 갇히게 되면 어쩌나. 내게는 같이 갇힐 용기가 없다.

 

그러면 같이 갇힐 용기는 어디에 있나. 예배 중 읽었던 본문 말씀이 떠오른다.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3)

 

결국 돌아갈 곳은 신앙인가보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내가 원수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다. 적군을 죽일 용기 대신, 적군조차 사랑할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이다.

부디 하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같은 용기를 허락하시기를 간구한다. 시대의 살아있는 양심, '양심수'들에게, 함께 예배드린 고함예배 식구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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