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의 정당개혁론에서 이해 안되는 말은 “당직 및 공직 후보자 선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정당이 자율적으로 행사해야 할 그 권한을 민주주의에서라면 어느 누구도 가져갈 수가 없다. 당연히 그걸 달라는 국민이 있을 수도 없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시민은 정당들이 내세운 공직 후보와 그들의 공약을 보고 최종적 결정권을 행사하는 주권자다. 정당들이 책임 있게 공직 후보를 내보내지 않으면 시민 주권은 의미가 없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해서 시민의 평가를 받아야 할 정당이 자신의 일을 시민에게 해달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런 민주주의는 무슨 민주주의인가.
혹자는 시민의 의사를 더 많이 반영하고자 정당 스스로 개방하겠다는데 그게 왜 문제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민주주의를 시민 의사를 모으는 일로 본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시민의 선호와 의사를 모으는 것이라면 굳이 민주주의를 할 일이 아니다. 그런 일에는 시장원리가 더 낫고, 여론조사로 대신할 수도 있다. 인터넷이나 모바일 등 손쉬운 기술을 활용할 수도 있다.
‘네트워크 정당론’은 그 결정판 같다. 그러한 정치관이 최대로 실현된다면 당직이든 공직이든 모든 정치인들에 대한 시민의 평가가 거의 매순간 집약될 수 있을지 모른다. 시민이 온라인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정치에서라면, ‘정치 주식시장’ 같은 것을 열어 모든 정치가들에 대한 시민 평가의 결과를 전광판처럼 보여줄 수도 있다. 굳이 돈 들여 선거운동을 할 일도 없고 정당의 역할도 필요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네트워크에 접속해 평가를 하게 되지? 각자 하고 싶을 때 하나 아니면 같은 시간에 다같이 접속해서 하나? 참여하지 않는 시민은 어떻게 하지? 그나저나 네트워크는 누가 깔고, 누가 관리하지? 확실히 이런 정치가 실현된다면 정당을 둘러싼 시끄러움은 사라지겠지만, 대신 기술 전체주의를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
민주주의는 정당정치를 통해 시민의 의사가 논의되고 형성되는 긴 과정을 가리킨다. 시민의 의사가 주어져 있고 이를 모아 대표를 정하는 게 다라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시민 의사의 결집과 그에 따른 대표 선발은 권위주의에서도 전체주의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들 비민주주의 체제가 절대 허용할 수 없는 것은 자율적 조직과 다원적 결사에 있다.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를 구분하는 가장 간단한 기준은, 복수로 조직된 정당들이 국가권력을 두고 경합하느냐에 달려 있다. 시민들이 주권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공적 결정에 필요한 정보비용을 최소화해주는 것도 정당의 역할인데, 그것 없이 시민 스스로 상황을 따져보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면 정보 능력과 지식 능력이 큰 계층 내지 이를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상층에 편향적인 결과는 피할 수 없다.
이처럼 단단한 공동체·팀·조직을 만드는 일이 중요한데, 네트워크 정당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당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없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당과 조직, 당원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이다. 벗어나고 싶지만, 대권과 재선을 위해서는 활용해야 하기에, 그들의 정당론에는 분열증적 심리가 가득하다. 사실 정당 연구자들에게 ‘네트워크 정당’이 생소한 말은 아니다. 원래 이 용어는 18세기 영국의 명사정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출신 가문이나 재산, 교육의 기준에서 특출했던 명망가들의 연줄 정당이라는 뜻이었다. 지금의 네트워크 정당론은 그와 다르다고 항변하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당의 독자적 대중 기반 없이 소수 명사들 위주로 추종자 동원에 전념하는 무정형의 여론정치만 심화시킨다는 점에서는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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