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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 흰목물떼새 서식조사를 마무리하던 즈음 금강마을을 보려고 영주댐 이설도로 한끝에 있는 이주단지로 갔다. 늘 눈길이 닿던 한곳이 휑했다. 금강마을에서 옮겨 심은 소나무는 보이지 않고 지지용 철 구조물만 서있었다. 고사한 나무를 베어낸 것이다.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을 나무였으니 이제 그만 떠나보낼 때이긴 했다. 밑동만 남은 나무가 향한 하늘에 구름이 몰려들었다. “조상님의 얼이 담긴 북편솔밭에서 정성들여 모셨으니 부디 잘 살아서 영원토록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되어달라” “일송정으로서 독야청청해달라”는 금강마을 이주단지 주민들의 소생축원이 하얀 구름이 되고 땅에서 200년을 살아온 소나무가 신선이 되어 그 구름을 타고 먼 여행길을 떠나는 듯했다.
금강마을 소나무. 2015년 11월 / ⓒ박용훈
따져보면 그 겨울 그렇게 급하게 나무를 옮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겨울로 들어서는 2015년 어느 날 이른 아침, 장선생님은 여기저기 산재한 조상 묘를 댐 밖으로 옮기기 위해 분주했다. 그 시간 한 업체가 마을의 낙락장송을 이주단지로 옮기려고 마을로 들어와 허술한 장비로 소나무를 거칠게 다루는 것을 보고 수공 직원을 불러 거세게 항의했지만 결국 새 이주단지로 급하게 옮겨진 장송은 그 늠름하니 푸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고사했다. 수공은 그해 겨울 금강마을 앞 다리를 끊었지만 댐 시험담수는 이듬해 7월에야 시작했다. 배려가 있었다면 주민들이 이주단지의 외롭고 낯선 생활에서 그나마 위로받고자 했던 나무를 죽이지 않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한편 이 시험담수가 댐 저수지에 크게 녹조를 만들어내면서 댐 하류 수질에 부담을 주자 김은경 전 환경부장관 재직기간에 담수를 중단시키고 물을 다 뺀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주민들로서도 살던 마을이 물에 잠기는 것보다는 아무 때고 원하면 몇 걸음 옮겨서 볼 수 있는 편이 마음이 덜 아픈 일일 듯싶다.
금강마을을 처음 찾은 것은 2010년 봄이었다. 영주댐 문제를 널리 알려온 성공회 천경배 신부님과 금강마을 장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도 그때였다. 그해 초여름부터 마을과 수몰예정지 강을 촘촘하게 찍기 시작했다. 인동 장씨의 금강마을 400년 터를 잡은 선대가 운포구곡이라고 불렀던 강은 전통마을을 태극 물길이 휘감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이런 곳이 왜 하류의 회룡포나 선몽대일원처럼 진즉에 명승 등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는지 많이 아쉬워했다.
내성천 영주 평은면 (운포구곡 지포). 2011년 5월 / ⓒ박용훈
탁 트인 하류 경관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영주댐 수몰예정지로 불렸던 강 곳곳에 배어있었다. “지포”라 불린 물굽이는 산자락을 따라 역동적인 물 흐름으로 변화무쌍한 형상이었고, “동저”라 말하던 넓고 뽀얀 백사장은 “뜰에 반짝이는 금모래”였으며, “금탄”이라 했던 금강마을 앞 불로산 큰 계곡은 맑은 강을 따라 고운 모래가 반짝이는 가운데 산 곳곳에서 나오는 고운 새소리가 강물 위로 맑게 퍼진 신선들의 공간이었다. 2010년 회룡포를 찾았던 버클리대의 랜디 헤스터 교수는 은퇴하면 여생을 보내고 싶은 곳이라고 칭송했지만 이 아름다운 상류의 산지하천은 그 너른 품안에서 위로받고 쉬기에 아주 적당한 공간이었다. 먹황새가 영주댐 공사 전에 겨울마다 금강마을 위 불로산 계곡에 머물렀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을 터였다.
상류구간을 처음 기록하면서 수몰예정지 강안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던 나를 영주댐 여수로 공사를 진행하던 현장에서 사람을 내려 보내 멈춰 세웠다. 그는 몇 마디 주고받다가 그곳이 사람들이 잘 모르는 깊고 외진 곳이라 이런 댐 공사가 가능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던 그분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영주댐건설단 앞 주민 집회. 2011년 2월 / ⓒ박용훈
2011년 2월 초순, 면사무소에 모인 여러 마을 주민들이 너나할 것 없이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른 채 고개를 넘고 금강마을 앞 중앙선 기차 길을 건너 영주댐건설단으로 향했다. 이날 시위는 이미 진행된 댐을 막겠다는 것보다는 보상 수준을 문제 삼았다. 바깥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 아니냐는 말들이 있었지만 그 보상비로는 이미 크게 올라버린 주변 땅을 사서 다시 농사지을 수가 결코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결국 아들딸 며느리사위에게 보상비를 슬금슬금 넘겨주고 나면 하릴없이 막걸리나 마시다가 생을 마칠 것이라는 자조와 고향을 영영 잃는 절망감이 공사 현장 앞 스텐 펜스에 몰려선 채 맞은편에 길게 정렬한 경찰들과 마주하던 주민들을 울먹이게 했다. 사람 간에 보상 형평 논란이 있었지만 보상의 한도는 있는 것이어서,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4대강사업의 일환으로 영주댐 건설을 강행하면서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살던 사람들을 그들의 땅에서 강제로 내쫓은 것이었다.
영주댐으로 인해 조상대대로 살아온 고향땅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531세대에 이르렀다. 댐으로부터 상류로 약 20km 일대에 걸쳐 수백 년간 이어져온 여러 지역공동체가 모두 해체되었는데, 퇴계 이황이 건립을 돕고 그의 사후에 사액사원이 된 이산서원을 비롯해서 금강마을 장씨고택 등 17점의 지정문화재 또한 제자리에서 전통을 잇지 못한 채 해체되었다. 이 전통한옥 대부분은 수몰예정지 내 이설도로 일대에 조성한 땅으로 옮겨서 다시 지을 예정이지만 그동안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해체한 나무 자재들이 뒤틀릴 가능성 때문에 복원이 제대로 될지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문전옥답은 사라진 채 덩그러니 집들만 한데 옮겨놓을 이곳을 문화재단지라고 부르지만 전통가옥에 살던 수몰민 한 분은 문화재란 제자리에 있어야 문화재라며 목청을 높였었다.
금강마을 마을회관 단오. 2012년 6월 / ⓒ박용훈
소나무가 고사한 자리, 이주단지 끝에서 몇 걸음 더 내디디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금강마을은 집과 집을 이어주던 길만 하얗게 남아 이곳이 전에 마을이었음을 희미하게 알려주었고, 집터며 마당이며 논밭은 모두 서러운 풀빛으로 덮였다. 아직은 장씨고택과 마을회관 자리가 어디인지 정도는 알 수 있는 정도다. 마을에서 제일 중요한 공간은 어느 동네나 그렇겠지만 마을사람들이 늘 오가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상사를 공유하는 마을회관이었다. 단오 때에는 많은 마을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하여 나눠먹으며 하루를 보내기도 하였다. 마을 일대와 강을 기록하면서 회관에서 잤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오랜 만남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마을 어머니들과 함께 웃고 차 마시며 밥 먹던 이런저런 기억들, 다시는 같이 차 마시고 밥 먹을 수 없는 그 시간들이 쓸쓸하게 스쳐지나갔다.
김기임 할머니의 고택 마당. 2011년 7월 / ⓒ박용훈
영남의 뿌리 깊은 전통마을이 4대강사업으로 인한 댐건설로 사라져야할 처지에 놓이면서 댐 공사 초기에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금강마을 등을 찾았다. 2010년 가을 어느 날에는,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학생들이 이산면 등을 돌아보고 평은면 금강마을에서 하루 밤을 묵었다. 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장씨고택을 찾아 여든이 넘은 김기임 할머니를 뵙고 오직 그분만이 전할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부지런하고 쾌활하셨던 할머니는 고령의 연세에도 넓은 마당에 야채를 심고 자주 잡풀을 뽑곤 하셨고, 찾아온 학생들과 함께 웃기도 하고 아픈 고통을 나누기도 하셨다. 일제 강점기 때도 버티고 6.25도 피해간 고택을 댐이 허문다고 한탄하신 내용이 방송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장씨고택 못 미쳐 회관 앞에서 불로산 방향으로 이어진 오르막길을 따라 여러 집들이 들어섰었는데, 그 일대에 사셨던 풍채가 좋고 목소리가 쩌렁쩌렁한 한 어르신은 2011년 가을 논에서 수확하여 마지막으로 거둔 벼를 집안으로 들이다 말고 보여줄 것이 있다며 방에서 A4흰 종이 몇 장을 들고 나오셨는데, 마을을 둘러싼 운포구곡 내력 등이 담겨있었다. 아름다웠던 고장을 기억해달라는 완곡한 표현인 듯했다. 한 집에서는 식구들이 마당 가득히 쌓인 생강을 다듬느라 분주했는데 문 밖까지 그 짙은 향기가 진동했다. 수확의 시기였지만 마을은 대체로 차분하고 조용했다.
평은역 기차 운행 마지막 날. 2013년 3월 27일 / ⓒ박용훈
금강마을과 내성천을 마주하고 달리던 중앙선 열차가 2013년 3월 마지막으로 평은역을 지나쳤다. 철길도, 철교도 모두 사라졌다. 이후 기차는 강변의 정겨운 마을과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는 대신 산 밑을 6km나 어렵게 뚫은 터널로 통과하게 되었다. 한국 철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볕이 좋은 어느 오후, 연로하신 이장님 부부는 평생을 함께 해로한 집 마당에서 손을 꼭 잡은 채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한 마을에서 동고동락하다가 각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 어머니들은 언제 다시 볼지 기약 없는 헤어짐이 아쉬워 집 앞 또는 밭 옆에서 서로 꼭 붙어 사진을 찍었다. 조상님들을 불로산 중턱, 마을 쪽을 향한 자리에 다시 모신 한 어머니는 곱게 외출복을 입으시고 운곡서원 유허비 앞에서 마을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셨다. 헤어지기 전, 한참 일할 나이에 마을을 자주 찾는 내가 걱정되셨던지 서울에서 자리 잡은 큰아드님 명함을 주면서 한번 연락해보라고 하셨다. 고택 위로 마당이 아담하고 가을 햇볕에 왠지 정겹던 남색 지붕 집에 사시던 어머니가 이사하던 날, 마당에서 찍은 모녀의 사진은 부칠 주소를 챙기지 못해서 사진박스에 남아있다. 아마도 마지막 인사를 사진 찍어달라는 말로 대신한 것일까? 어떻게들 지내실까? 다들 건강하실까?
문화재청의 금강마을 금강사 터 보존 성토공사. 2015년 11월 / ⓒ박용훈
늦게까지 마을에 남아계셨던 한 어르신이 마을에서 고려시대 사찰 터가 나왔다면서 집 주변 여기저기 안내해주셨다. 한자로는 다르지만 금강마을과 이름이 같은 금강사라고 밝혀진 이 사찰 터에서 나온 광명대 등 유물이 보물급이어서 절터를 보전해야 한다는 한 문화재 전문가의 주장이 있었지만, 문화재청은 발굴된 금강사 터 위에 성토한 후 물속에 남겨둔 채 보전하는 희한한 보존방식을 결정하였다. 이 보존방식이 댐 만수위 때의 수압을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한 공학적 검토는 결정과정에서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11월 말, 그때까지 남아 계신 마을 몇 분이 김장을 했다. 넉넉히 담가 플라스틱 박스에 담아 이웃도 주고, 누군가에게 가져가라고 전화도 했다. 어려서 이웃집들이 같이 모여 김장하는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빨간 속을 싼 노란 배추를 내밀어주면 받아먹던 때처럼 한 조각 받아서 먹었다. 고소함과 짭짤함에 더해 무언가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금강마을에서의 마지막 만찬이었다.
금강마을. 2015년 11월 / ⓒ박용훈
이 마지막 김장이 있던 날 장선생님은 꼬박 이틀을 긴장 속에 보냈다. 조상 아홉 분의 무덤을 찾아가 그 유골을 잘 수습해 수몰예정지 밖으로 모셔야 했기 때문이다. 금강마을 뿐 아니라 동호 등 주변의 들과 야산에 흩어진 산소를 일일이 찾아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정중히 예를 갖춘 후 옮겨서 다시 모셨다. 영주 어디쯤 좋은 자리로 이장하는 모든 일이 끝나자 그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조상님들을 모실 적당한 새 터를 찾는 일이 많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영주댐 사전환경성검토서에는 댐 주민들의 구구절절한 하소연이 기록되어 있다. “조상을 6대 봉사자로서 조상 유골을 모실 산도 없고 산소는 30여 상부나 된다. 400년 넘는 고향을 물속에 넣기가 원통하다” “수백년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명지와 옥토, 조상 산소를 감당할 길이 없는 댐 건설은 결사반대합니다.”
영주댐 건설로 해체된 여러 마을 주민 중 조상대대로 살아온 마을 가까운 곳에 정착해서 살기를 원하는 주민들이 댐 수몰예정지 3곳에 이주단지를 조성했다. 그중 금강마을 주민들은 마을을 내려다보던 선산 일대에 자리 잡았는데 이곳은 댐을 가동할 경우 사방으로 저수공간에 둘러싸이는 형세다. 금강마을 이주단지에서는 전처럼 마을 주민들이 새벽 5시면 농사일 나서느라 분주하던 모습은 물론 볼 수 없다. 농사지을 땅이 없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때 되면 모여 믹스커피 한잔으로 담소하다가 점심을 함께 차려 먹고 해지기 전에 각자의 집으로 향하던 마을회관, 단오 때는 모여서 음식을 함께 만들면서 웃고 놀거나 어버이날 손주가 달아준 카네이션을 자랑하러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던 마을회관은 새로 만들어진 금강마을 이주단지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금강마을 훼손 전 마을회관 모습. 2015년 6월 / ⓒ박용훈
각지에 흩어진 주민들이 어쩌다 이주단지를 찾아와도 편하게 만나서 서로 소식을 묻고 이야기 나눌 마땅한 곳이 없다. 까닭이야 없지 않겠지만 이주단지 세 곳 중 새 평은면사무소 옆에 자리 잡은 이주단지에만 현재 마을회관이 만들어졌다. 땅을 갈며 농사짓고 살다가 한 순간에 사는 공간이 크게 줄어든 이주단지 주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2016년 여름 KBS 대구방송이 내보냈는데,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하소연, 새 집에 앉아 종일 TV를 마주하거나 우두커니 창 밖에 시선을 둔 채 시간을 보내는 안쓰러운 모습이 전해졌지만 3년이 지난 지금 별로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영주댐 상류 이주단지 옆에 설치한 관광용 다리들. 그 아래로 녹조가 가득하다. 2017년 8월 / ⓒ박용훈
한편 영주댐 이설도로를 따라 소위 “명품관광댐” 구상과 관련 있는 여러 시설투자가 이루어졌다. 이주단지 끝에는 커다란 관광용 다리를 2개 설치하고 안쪽으로는 댐으로 사라진 평은역 모조 구조물이 설치되었다. 댐 상류 이설도로 곳곳에 돌조각 등과 함께 작거나 큰 휴식공간이 설치되었고, 이설도로를 따라 새로 심은 조경수가 고사할까봐 물주머니를 나무에 달아 차량으로 물을 공급하는가 하면 금강마을 이주단지와 멀지 않은 곳에 영주호용마루공원이라는 시설도 작년에 새로 들어섰다. 미림교를 통해 진입하는 영주댐 초입에는 강에 붙은 산 절벽에 인공폭포를 세워 폭포수를 이번 여름 내려 보내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하나뿐인 지구”에서 산다. 이 지구에서 지금 가장 심각한 현안은 물론 지구온난화 문제이다. 플라스틱 공포도 만만치 않다. 국내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아 보인다. 미세먼지의 심각성을 온 국민이 이미 체감하고 있고, 4대강사업 후 특히 낙동강에서는 1,300만 유역 주민의 먹는 물 문제가 심각하다. 인류와 지구의 “지속가능성”과 밀접한 이런 문제는 더 이상 전문가들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 있고, 또한 모두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멸종위기에 처한 생물의 문제가 인류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고, 사회적 약자를 향한 공적 배려에 힘쓰다보면 공존에 장애가 되는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정리하는 결단을 이끌어낼 수 있다.
영주댐은 상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사업이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모래강이 스스로 맑게 하면서 낙동강에 맑은 물을 보내왔는데, 이 역할을 콘크리트댐이 하겠다면서 강행해서 결국 수질문제 외에도 여러 심각한 생태적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영주댐으로 인해 살던 터전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삶의 질 저하문제는 우리사회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중앙정부든 지자체든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하였고, 힘써야 할 일을 저버린 까닭이다. 그래서 우선 급한 것 하나를 든다면, 최소한 고향 잃은 노인들이 서로 위로할 수 있는 작은 공간으로 마을회관 정도는 그곳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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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풍소식>은 초록사진가이자 생태지평 운영위원인 박용훈 님이 사진과 글로 강이 전하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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