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건강수다방 사전 인터뷰]
- 나만 우울하고 무기력한 거야? 더 이상의 방콕은 없어 방콕탈출기
- 인터뷰이 : 유경희(마음을 공부하는 생기랑마음달풀 연구소 소장)
- 인터뷰어 : 박진희(여성환경연대 여성건강서포터즈)
1. 상담치유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게 된 개인적인 계기는?
94년도, 민우회 내에 있는 가족과 성 상담소에서 일을 하면서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만났고 상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97년부터 한부모 운동을 시작해서 그 일을 하게 됐는데 한부모 여성들이 역량강화를 할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스스로 한계가 느껴지더라. 그래서 상담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한부모 여성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았던 일이 상담치유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다. 한부모 여성들과의 관계가 내게 많이 각인 되어 있고 그 만남이 나를 많이 성장시켰기 때문에 그 때 얻은 ‘생기’라는 별칭을 좋아라 하면서 계속 쓰고 있다.
2. 우울하고 무기력한 데에 개인적 요인도 있고 사회적 요인도 있을 텐데 그 둘을 분리해서 원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문제라는 건 나와 연결된 타인과 집단과 사회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이것들을 분리해서 원인을 찾는 게 사실 어렵다. 문제라는 게 복합적이니까. 그렇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안에서 나에게 속하는 문제, 일상적으로 중요한 관계맺음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문제,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경계 지어 하나씩 제대로 살펴보고 정리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자기 탓만 하거나 자괴감에 빠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조금 가벼워져야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도 찾을 수 있고.
경계를 지어서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는 거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원하는 게 무엇이고, 이렇게 자기를 집중적으로 해부하고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일상에 휘둘리고 주어진 일에 떠밀려서, 또는 관계 속에 시달리느라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기회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자기 해부과정은 그 자체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필요한 것, 자기가 원하는 걸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욕구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욕구 충족을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할 수 있다. 필요한 정보를 찾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스트레스를 날리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해 보거나… 방콕하거나 손 놓아버리지 말고 무엇에든 손을 내밀고 발걸음을 떼어 보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경험들이 쌓여서 자기만의 노하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고 난 후에는 자기와 연결된 고리들, 인간관계의 고리와 사회구조적인 고리를 잘 파악하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한다. 그런 노력으로 우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아는 현명함을 얻게 되니까.
3. 요즘 청년세대는 이전보다 더 힘들어 보입니다. 탈출구를 찾기도 쉽지 않아 보이고요.
청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에는 사회적인 장벽이 만만치 않다. 도전이라고 하기에는 벽이 지나치게 높은 셈이다. 끝없는 경쟁에 시달리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에 자기를 맞추기 위해 젊은이들이 너무 많은 애를 쓰고 있어서 안타깝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서 경험을 통해 배우기도 하고 격려도 받고 지원도 받아야 하는데 그런 관계망도 튼튼해 보이지 않고.
기존의 사회구조 안에서 일정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길을 가든 대안을 찾아서 새로운 길을 가든 어떤 것이나 많은 노력과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너무 조급하게 뭔가를 성취하려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아야 한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자기가 정말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자기의 현재 능력은 객관적으로 어떤지, 원하는 삶을 위해서 지금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자기정립부터 시작했으면 한다. 인성이 아니라 성적! 요즘 학교 교육이 이런 상태라 자기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자연스럽게 갖기가 쉽지 않다.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조급함과 긴장감을 잠시 내려놓고 자기만의 인생설계, 자기다운 인생설계를 먼저 했으면 좋겠다. 삶의 경험도 나눠주고, 나만의 인생설계도 응원해 줄 수 있는 지원세력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4. 자아실현 욕구와 양육에 대한 책임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경험, 많은 여성들이 하게 됩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여성들이 심리적인 대가를 힘겹게 치러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고요.
양육과 돌봄의 책임이 거의 전적으로 여성에게 떠넘겨져 있는 사회라 어떤 선택을 하든 힘들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선택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여성이라는 자책감으로, 또 다른 선택은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허탈감으로 이어지기 쉽다. 여성이 자기가 한 선택을 계속 회의하게 만드는 구조라서, 여성 스스로 자기 중심을 잡지 않으면 계속 휘둘릴 수밖에 없다.
보육환경 자체를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를 하면, 이것 역시 자기 욕구의 우선순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떤 선택도 후회나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내가 처해 있는 구조 조건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가, 어떤 선택을 해야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 덜 후회하고, 내 선택이 최선이라고 스스로 받아들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결정해야 한다. 결정 후에는 자기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믿어줘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자기 선택이 무엇을 가져다주고 무엇을 내려놓게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어떤 것도 놓지 않겠다는 욕심을 부리면 힘들어진다.
5. 공동체의 단순한 일원이라는, 소속감이 부족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처럼 되어 버려서 우울증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요? 공동체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야 할까요?
공동체성은 찾아갈 수도 있고 스스로 만들어 갈 수도 있다. 사소한 것이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고 관심이 가는 것이 있을 때, 비슷한 욕구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필요한 것을 나누고 공유하는 관계를 형성하면 그게 공동체다. 거창한 게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밖으로 나와서 관계맺음을 시작하면 된다.
1인 여성가구를 위한 이 공간(어슬렁정거장 카페)에 여성들이 혼자 와서 노트에다 자기 이야기를 적고, 누군가 그것을 보고 다시 노트를 통해 대화를 나누곤 한다. 그렇게 1인 여성가구로 살아가기 위한 정보도 나누고 마음도 나누다가 비슷한 관심을 묶어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고. 여성단체들의 시작도 처음에는 관심사와 필요를 묶어서 만든 소규모 동아리였다. 관심이 확대되면서 조직의 규모가 함께 커갔던 것이다.
요즘은 온라인상으로 필요한 정보나 모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잘 그릴 수 있으면 그것을 채우기 위한 정보나 자원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조건인 셈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고 그것을 채우겠다는 마음을 먹고 가볍게 발걸음을 떼면 된다. 한 번 연결고리를 가지면 계속해서 정보와 관계를 쌓으면서 자기 힘을 키워나갈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자기가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게 쉽지 않다.
6. 개인이나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갑자기 심적으로 허물어질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마음과 정신을 일상적으로 건강하게 유지하려면요?
자기가 심적으로 허물어졌다는 걸 알고 인정하는 게 첫 번째다. 너무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게 쉽지 않다. 아프고, 힘들고, 바닥을 친 자기를 보는 게 두려워 자기 상태와 감정을 계속 회피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렇지만 자기가 심적으로 허물어졌다는 걸 인정해야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내가 이런 상황이구나, 이런 감정이구나 하는 것을 인정해야 시작될 수 있는 자기 표출이 있다.
우리 사회는 여성들에게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자기 욕구 분석이나 솔직한 감정표현, 특히 부정적인 감정표출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자기를 내세웠을 때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던 경험이 많으니까. 여성들의 자기희생을 전제로 했을 때만 평안하게 굴러가는 시스템들이 있는데 그것에 길들여지면 여성들은 자신을 숨기는 가면을 계속 쓰면서 살아야 한다. 여러 가지 가면을 계속 쓰면서 살아가다 보면 나는 없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아프고 지친 자신을 대면해야 하고.
자신을 제대로 알고 받아들이고 표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인정하고 평가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인정하는 나, 내가 만들어 가고 싶은 나, 내가 살고 싶은 인생. 이런 식으로 나를 알아가다 보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 최선이 아닐 때는 차선을 찾을 수 있다. 허점도 있고 고쳐할 점도 있는 부족한 나를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부족할 때는 내가 부족하구나 하고 인정하고, 부족하니까 채워야겠구나 생각하면서 노력하고, 채우려고 노력하다 보면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을 거다 기대하고 이렇게 해나가면 된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자기가 손해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기적으로 살자는 이야기? 아니다! 손해 본다는 건 상처받고 힘들어진다는 의미다. 자기가 상처받고 힘들어지면 관계에도 문제가 생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준다. 자기 의지를 표현하는 건 이기적인 게 아니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동시에 타인을 존중할 수 있는 상생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내가 싫어지고 한심할 때, 바닥을 칠 때,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찌질한 모습 그대로 찾아갔을 때 토닥토닥 하면서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자신의 빽을 적어도 세 사람은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런 대상을 확보해 놓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댓글 달기